2024년을 보내주며
2024년의 마지막 날, 하루로 일년을 보내며
2024년은 많은 일이 있던 해였기에 올해가 가기 전 짧게라도 있던 일들을 읊으며 보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2024년의 대변화
- 결혼을 했다.
- 결혼을 통한 독립을 했다.
- 수영을 다니기 시작했다.
- AI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시작했다.
- 대통령이 계엄을 선언했다.
- 이력서를 썼다.
결혼과 독립
결혼을 하며 독립을 하게됐다. 그 전에도 몇 번 몇 년 동안 본가에서 나와서 산 적은 있었지만, ‘임시’였다. 이제 엄마집은 엄마집, 내 집은 내 집(정확히는 우리집), 별도의 가정으로 분리되었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정의 주도자(?)가 된다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 엄마의 가정 구성원 탈퇴도 내게는 꽤 큰 일이었다. 여전히 엄마는 나의 엄마고, 가족이지만 난 이제 둥지 속을 나온 것이다!
서른이 되었을 무렵부터, 단순히 혼자살고 싶어서가 아닌 이제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돈이 없어도 독립을 해야겠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다. 그러던 무렵 지금의 남편과 결혼 얘기가 오갔고, 자취방보다는 신혼집이 먼저 구해진 느낌으로 결혼을 하게 됐다. 어쨋든 독립을 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결혼을 하면 기뻐하지만 사실 나는 근래들어 슬픔이 더 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의 1순위 가정은 나의 원가족이 아닌 지금의 가족이니, 부모님들은 애써 키운 딸내미에게 서운함을 느낄 일이 더 잦을 것이고, 그걸 감당해야 한다. (감당하기 싫다면 결혼시키지 마시라!) 또 한편으론 부모의 사랑은 위대하니 내가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고, 그래도 이제 으른(독립된 가정의 주도자)이 되었다는 기쁨이 더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행복하다. 기대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고, 따뜻하고, 온전하다. 결혼 초반에 친구가 결혼하면 다들 안정감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나도 그렇냐는 질문에 딱히라고 대답했었다. 그때는 결혼 두 달차 쯤이었는데, 좋긴 좋았지만 연애 때랑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8개월차에 접어든 지금은 완전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 같다.
예전에 ‘크라운’이라는 영국 드라마를 보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와 같다. 왕실 드라마 답게 온갖 계략과 배신, 갈등이 난무하는데, 나는 공감을 너무 잘 하는 편이라 힘든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인물에게 크게 동정이 갔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악역이든, 선역이든 간에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고 지지를 받는 인물에게는 힘든 사건이 일어나도 큰 걱정이 안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어쨌든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그게 무엇인지 설명은 못해도, 알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받쳐주고 아껴주며 살고 있다.
수영
3월에 신이문으로 이사오며, 집 근처에 레포츠센터에 수영을 등록했다. 한 번도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었는데 언젠가는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등록했다. 매주 화/목 아침 7시 수영반이다. 빠듯하지만 아침에 수영을 하고 집에 와서 짐을 두고 출근할 수 있다.
수영에 다닌 첫 주는 물에 뜨지도, 발차기를 해도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너무 답답하고 재미없고 슬펐지만(진짜 너무너무 슬펐다), 신기하게 둘 째주부터는 물에 뜨기도 하고, 나름 발차기가 나아갔다. 나는 자유영을 처음 배울 때도, 배영도, 평영도, 지금 배우는 접영도 처음에 반에서 제일 못한다. 며칠 전에도 선생님에게 특별 수업을 받았다. (특별 수업을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사실 좀 부끄럽다. 남들 나아갈 때 나도 슝 가고 있으면 선생님이 몸통을 잡는다. - 못하는 학생을 낚아채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착해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허우적 허우적 배운다.) 하지만 수영을 다니기 시작한 둘 째주의 기억과 희망으로 용기를 내서 매번 약간은 마음을 비우고, 그러려니 하며 배우고 있다. 언젠가는 동작이 되겠거니 하고.
아침에 수영을 하고 출근을 하면 자존감이 많이 올라간다. 수영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오늘 수영을 빼먹지 않고 나간 내 자신이 너무 기특하다. (부작용으로 반대의 날은 자존감이 꽤 많이 떨어진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어느덧 내 추구미가 되었고, 아직은 초보반이지만, 그래도 수영을 잘하진 못해도 즐기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AI 어플리케이션
작년 말 팀장님이 물었다. “내년에 AI 쪽 하고 싶어? 아님 어플리케이션 운영 개발?”. 나는 빠르게 답했다. “어플리케이션 운영개발이요!”. 그 만큼 AI 쪽은 피하고 싶었다. 몇 년 전 ML, NLP 쪽은 살짝 공부했던 적이 있었는데, 일단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어렵고 대학원은 가야 알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신혼 여행을 다녀온 5월 말, 다녀오니 나는 팀에서 AI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해 공부하고, 사내 강의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리둥절 했지만, 몇 년만에 다시 만난 AI는 그 때의 AI가 아니었다.
생성형 AI가 작년 말 - 올 초 사이로 엄청난 발전을 했고, 이제는 모델을 직접 훈련시키지 않아도 Langchain, Llama와 같은 LLM 프레임워크만 잘 사용하면 손쉽게 AI 어플리케이션 개발이 가능했다. (쉽지만 뭐든 그렇듯 잘 만드려면 어렵다.) 진입장벽이 낮아진 AI에 꽤 큰 흥미와 충격(AI Agent를 처음 접했을 때, 집에 와서 남편을 붙들고 한참을 얘기했다. - 개신기하다고!)을 갖고, 이게 미래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앞으로 AI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AI를 잘 쓰기 위해서는 설계를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많이 경험해봐서 경험을 통한 설계를 잘하는 개발자로 성장하고 싶다. 최이사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Agent, Rag Deep Dive를 강조하고 떠나셨는데.. 이것도 열심히 공부하리라!
대통령 계엄
아침 수영을 다녀와서 피곤한 화요일 저녁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싶어 11시 쯤 안방에 들어가려던 찰나, 남편이 갑자기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했다. 네? 네? 계엄이요? 전두환이 했던 그거? 갑자기? 누가? 왜? 불안한 마음으로 뉴스를 틀었고, 그날 나는 새벽 3시까지 잠이 들 수 없었다. 뉴스를 보는 내내 너무 무서웠고, 끔찍했다. 나름 착실히 열심히 즐겁게 살던 내 인생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건가. 저 윤뚱땡때문에.. 너무 한숨이 나고, 우리 나라가 불쌍하고..
그날 밤 나는 우리나라에 못 살겠단 생각이 들었다. 치열한 경쟁, 빡빡한 회사생활, 높은 집값, 낮은 복지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 날의 불안은 다신 겪고 싶지 않다. 그 주 주말 남편과 나는 3-4년 뒤 이민을 위한 준비를 이야기 했다.
이력서
내가 꽤나 만족하고, 애정했던 우리 팀이 사라졌다. 우리 팀의 팀명은 DevOps팀이었지만, 회사 내 여러 가지 기술적 지원 업무를 했고, 더불어 새로운 기술(내가 AI를 접할 수 있던 이유)을 탐구하고 tool로 개발해볼 수 있는 팀이었다. 즉, 당장 돈은 못 버는 팀이었고, 있으면 좋지만 당장에 없어도 될 팀이라는 이유로 한 푼이라도 돈을 줄이려는 회사 사정으로 인해 팀이 사라짐을 통보 받았다.
팀이 사라지기 전, 나의 사수였던 조이사님의 퇴사가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조이사님의 퇴사 전날까지 하루라도 더 배우리라는 마음으로 내가 받지 않을 인수인계 회의도 들어가서 열심히 배웠다. 덕분에 docker, server, gitlab, cicd, aws 등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이제 이 발판으로 아기새에서 둥지를 떠나 혼자 날 수 있는 힘을 키워보려 하는 중! 팀이 사라졌다.
사실 상처가 컸다. 우리 팀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내가 하던 업무들도 중요치 않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다. 회사가 이제 직원을 돈벌이 용도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분노보다는 위기감으로 느껴졌다. 나는 기술 회사 연구소 소속이었는데, 연구소 직원을 돈 못 벌어온다는 이유로 돈이 버는 팀으로 옮기는 것은 회사의 앞날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미루었던 이력을 정리하고, 이력서를 썼다. 정리하다보니 devops팀에 있는 동안 정말 많이 배웠고, 감사했다. 이제는 지금 옮긴 팀에서도 많이 배우려 노력하고, 또 더 많은 개인적 노력을 하며 더 좋은 개발자로 성장할 시기 같다. 팀의 폭파는 나에게 큰 동력이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